원자폭탄의 아버지로 불리는 오펜하이머와 ‘수소폭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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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폭탄의 아버지로 불리는 오펜하이머와 ‘수소폭탄’

원자폭탄의 아버지로 불리는 오펜하이머와 ‘수소폭탄’

러시아 47년 만에 달로 향했다 미국 “중국만이 경쟁자”

오펜하이머라는 이름은 다른 유명한 과학자들에 비해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오펜하이머는 20세기 과학계는 물론 역사에도 발자국을 남긴 물리학자로 기억된다.

오펜하이머의 굴곡진 삶을 둘러본다.

오펜하이머의 이름을 들어봤다면 그를 ‘원자폭탄의 아버지’라고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런데 원자폭탄 같은 최첨단 무기를 혼자서 개발했을 리가 없다.

원자폭탄은 당시로서는 역대급 규모의 인력과 자금이 투입된 대형 연구개발 프로젝트의 결과물이었다.

미국에서 원자폭탄을 만들기 위한 ‘맨해튼 프로젝트’가 시작된 것은 1942년의 일이었다.

이 프로젝트를 성공시키기 위해 미국 전역에서 수천 명의 과학자, 엔지니어,

기술자들이 뉴멕시코주 사막의 로스앨러모스, 테네시주 오크리지를 비롯한 약 서른 군데의 시설에서 각자의 역할을 수행했다.

1급 비밀로 진행된 맨해튼 프로젝트는 정보가 새어나가는 것을 최대한

방지하기 위해 자신이 맡은 일만큼의 정보만 제공하는 ‘구획화’ 정책을 채택했다.

프로젝트의 전모는 ‘과학 총책임자’를 맡은 오펜하이머를 비롯한 극소수만 알 수 있었다.

로스앨러모스 연구소의 소장이었던 오펜하이머는 과학 이론과 기술 분야의 총책임을 맡았다.

그의 역할은 각 부서에서 올라오는 정보를 취합해 프로젝트 성공을 위한 시급한 사항에 지시를 내리고 그에 필요한 자원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원자폭탄 개발의 책임을 맡았다는 의미에서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의 아버지’라는 호칭을 얻기에 부족함이 없기는 했다.

그렇다면 프로젝트가 시작할 당시 38세밖에 되지 않은 젊은 교수였던 오펜하이머가 이런 중책을 맡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는 미국 하버드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물리학 연구자가 되기 위해 영국 케임브리지대와 독일 괴팅겐대에서 대학원 과정을 마쳤다.

그가 유럽에서 공부할 당시 물리학계에서는 이른바 ‘고전물리학’에서 ‘양자물리학’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이 일어나고 있었다.

오펜하이머는 격변의 현장에서 뛰어난 논문을 써 영국과 독일 등 세계 과학의 중심지에서 인정을 받았고

미국으로 돌아온 뒤에는 최첨단 물리학 이론을

가르칠 수 있는 몇 안되는 학자들 중 하나가 됐다.

그는 버클리 캘리포니아대에서 수많은 대학원생을 이끌며 미국 물리학계의 학파를 형성했고

자신의 매력적인 성품을 바탕으로 젊은 시절에 이미 카리스마 넘치는 과학계의 지도자로 떠올랐다.

맨해튼 프로젝트가 시작되자 프로젝트 총책임자였던 레슬리 그로브스 장군은 당시 미국에서 원자폭탄

연구를 하던 연구소 책임자들에게 과학 총책임자 직을 부탁했으나 거절당했다.

대신 추천받은 이가 오펜하이머였고 그는 이전에 관리 업무를 담당한 적이 없었음에도 거대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훗날 그로브스 장군은 오펜하이머를 임명한 것이 자신이 내린 가장 좋은 결정이었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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