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맞이꽃의 수줍은 고백 대기오염에 막혔다
달맞이꽃의 수줍은 고백 대기오염에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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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여름 하얀/달밤이 되면/그만 고백해 버리고 싶다/그대 내 사람이라고 입으로 부르면/큰일 나는 그 사람/하르륵! 향기로 터뜨리고 싶다.’
다들 화려한 말과 행동으로 사랑을 뽐내지만, 마음에 담은 이를 부르지도 못하는 아련한 사랑도 있다.
문정희 시인은 이렇게 애타는 마음을 다른 꽃들이 다 지고 밤이 돼서야 비로소 은은한 향기를 내는 달맞이꽃에 빗댔다.
달맞이꽃은 아메리카 원산의 귀화식물이다. 이름 그대로 달이 뜨는 밤에 꽃이 핀다.
벌과 나비도 잠든 밤에 피다 보니 꽃가루받이는 야행성 곤충인 나방이 맡는다.
보통 나방이라고 하면 불빛에 몰려드는 기분 나쁜 곤충을 떠올리지만, 도심에 사는 식물의 3분의 1이 꽃가루받이를 나방에 의존하고 있다.
묵묵히 생태계에서 제 몫을 하던 나방이 위기에 빠졌다. 도시의 대기오염에 밤에 피는 꽃이 내는 향기가 갈수록 약해지면서 나방이 길을 잃은 것이다.
나방이 밤에 꽃가루를 옮기지 못하면 꽃이 결실을 얻지 못하고, 그 열매에 기대 사는 다른 동물들도 생존이 위태로워진다.
라디칼은 공유결합을 하지 못한 홀전자를 가져 불안정한 상태의 원자나 분자를 말한다. 유리기(遊離基)라고도 한다.
다른 원자나 분자의 전자를 빼앗아 안정된 상태로 가려는 성질이 있어 인체에서 세포나 DNA를 손상할 수 있다.
연구진은 시애틀에서 약 280㎞ 떨어진 풀밭에서 달맞이꽃이 내는 향기를 채집했다.
꽃향기에서는 22가지 화학성분이 검출됐다.
연구진은 박각시나방(학명 Manduca sexta), 멋쟁이박각시나방(Hyles lineata)이 이런 향기 화합물에 노출될 때 더듬이에서 나타나는 전기신호를 확인했다.
나방들은 여러 화학성분 중 모노테르펜(monoterpene)이라는 성분에 특히 민감했다. 모노테르펜은 침엽수에서 많이 나오는 물질이다.
다음은 달맞이꽃 향이 대기오염 물질에 어떤 영향을 받는지 알아봤다.
연구진은 화학분석 결과를 바탕으로 인조 달맞이꽃 향을 만들고, 대기오염 물질인 오존과 질산염 라디칼을 첨가했다.
산소 원자 3개로 이뤄진 오존은 햇빛이 있을 때 형성돼 낮에 풍부하고, 질소와 산소 원자로 이뤄진 질산염 라디칼은 햇빛에 분해돼 밤에 더 많다.
인조 향에 오존을 첨가하자 두 가지 모노테르펜 성분의 농도가 30% 줄었다.
질산염 라디칼을 추가하자 감소율이 84%까지 증가했다. 밤에 피는 달맞이꽃에 질산염 라디칼이 치명적이라는 의미다.
연구진은 종이로 만든 달맞이꽃에 인조 향을 뿌렸다.
나방들은 꽃을 찾아 날아들었다. 하지만 질산염 라디칼에 모노테르펜이 분해된 향을 뿜자 나방들이 주춤했다.
박각시나방의 꽃 방문율은 50% 줄었고, 멋쟁이박각시나방은 더 이상 꽃을 찾지 않았다.
연구진은 오존만 추가하면 나방의 행동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밝혔다.
야외 실험도 마찬가지였다. 질산염 라디칼에 분해된 향기를 방출한 꽃은 나방 방문 빈도가 다른 꽃보다 70% 낮았다.
자연에서 나방은 밤에 꽃마다 평균 두 번씩 방문하지만, 질산염 라디칼에 분해된 향기를 방출하자 방문 횟수가 이틀에 한 번으로 줄었다고 연구진은 밝혔다.
어떤 나방은 꽃향기를 전혀 맡지 못했다. 리펠 교수는 “마치 나방이 코로나에 걸린 것 같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