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는 감염병과 함께 진화 ; 중세 유럽 인구 절반의 목숨을 빼앗은 감염병인 ‘흑사병’이 인간의 면역 체계를 바꿨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인류가 감염병과 함께 진화했다는 그간 학계의 연구와 맥락이 이어지는 연구다.
미국 시카고대와 캐나다 맥마스터대, 프랑스 파스퇴르연구소 등 국제공동연구팀은
흑사병이 유행하던 시기에 인간의 면역 유전자 변이가 달라졌다는 연구 결과를 국제학술지 ‘네이처’ 10월 19일자(현지시간)에 발표했다.
[ 비행기·기차 등의 교통소음 , 심혈관에 심각한 악영향 ]
흑사병은 숙주 동물인 쥐에 기생하는 벼룩에 의해 페스트균(Yersinia pestis)이 전파돼
발생하는 감염병으로 1300년대 중반 중세 유럽에서 유행해 7500만~2억 명의 인구를 죽음으로 몰아갔다.
흑사병으로 인한 대규모 사망은 진화적 관점에서도 상당한 변화를 이끌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연구팀은 1348~1349년 흑사병으로 사망한 사람들이 대량으로 매장된 영국 런던
이스트 스미스필드 공동묘지를 비롯한 2곳에서 뼈 318구, 덴마크 소재 묘지 5곳에서 뼈 198구를 얻었다.
전염병 유행 시기 약 100년 전후로 살았던 사람들의 뼈다. 연구팀은 뼈에서 DNA를
추출한 뒤 염기서열을 분석해 면역 반응과 관련된 유전자 356개 중 흑사병 이후 245개의 유전자가 변이를 일으켰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인류는 감염병과 함께 진화
연구팀은 페스트균을 방어하는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유전자를 추렸다.
그중 하나가 ‘ERAP2’ 유전자다. ERAP2 유전자는 면역체계가 감염원을 인식하는 역할을 한다고 알려져 있다.
연구팀은 ERAP2에 변이(rs2549794)가 생기면 단백질을 더 많이 만들어
면역 체계가 신체를 심하게 병들게 하는 감염원을 더 잘 인식하도록 돕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루이스 바레이로 시카고대 유전의학과 교수는 “대식세포는 균의 일부를
다른 면역세포에 전달해 감염됐다는 신호를 보낸다”며 “ERAP2 유전자에 변이가
생기면서 면역체계의 능력이 향상됐다”고 말했다. 연구팀은 ERAP2 유전자에 변이가 생긴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흑사병에서 생존할 가능성이 40~50% 높았을 것으로 추정했다.
연구팀은 생존에 유리한 ERAP2 유전자 변이가 이전의 질병에 걸리기 이전의 유전자가 도태되고 진화적으로 선택됐다고 결론을 내렸다.
질병과 유전자를 연구하던 바레이로 교수는 “흑사병이 인간 면역 체계 진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증명됐다”고 말했다.
한편 중세 시대 흑사병으로부터 생존을 도왔던 ERAP2 유전자가 지금은 되려
질병을 유발하는 요소로 작용하기도 한다. ERAP2 유전자는 크론병을 유발하는 위험 인자로 알려져 있다.
크론병은 소화기관에 발생하는 만성 염증성 질환으로 고혈압, 당뇨, 비만 등과 함께 현대인의 질환으로 꼽힌다.